편지라는 행위만으로 우리는 눈 덮인 벌판에 서 있었다
겨울에 대한 끊임없는 여백
읽을 때마다 다른 곳에 있는 문장들
욕조에 물을 받듯이 그것을 옮겨 적을 수 없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곳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흐르고 있는 것인지
기침과 침묵에 대해 쓰면 얼음이 되어 닿았다
묘지에서 돌아오는 저녁 입김에 대해 쓰면
얼음에 찍힌 새의 발자국이 되어 닿았다
겨울 모스크바 편지, 김성대
인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1호의 예약을 걸어 두고, 런던행 비행기를 기다리며 아빠에 관한 원고(5호)를 쓰기 시작했고, 런던의 공항버스에서는 베를린을 이야기(4호)했어요. 런던의 마지막 밤엔 오슬로를 기억(8호)하고,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9호를 완성했죠. 그저 잠을 자거나, 유튜브를 보거나, 노래를 들으며 보냈을 수도 있는 시간들이 머리 아프게, 그러나 눈부시게 흘러갔어요.
우리가 나눈 9통의 편지 덕분에 저는 아주 자랐답니다. 먼저, 글에 공을 들이는 법을 배웠어요. 손 글씨가 아닌 딱딱하고 반듯한 활자로 전달되는 편지이니까 제 마음에 어울리는 단어를 찾기 위해 애썼어요. 국어사전 페이지를 열어 두고 낯선 글자들을 맞이하는 일은 재밌었어요. 새로운 도시를 즐기기 위해 저는 열심히 걸었습니다. 본래의 저였다면 17일의 시간을 똑같은 속도로 걸었을 것이고, 그게 오히려 만족스러웠을 거예요. 하지만 여러분 덕에 오랜만에 달렸고, 멈췄고, 넘어지기도 했어요. 그리고 그 순간들은 참 즐거웠답니다. 편지를 기다릴 누군가를 떠올리며 간만에 반짝이는 하루를 살아볼 수 있었어요. 제가 순간에 감응할 수 있는 사람이란 것, 이런 문장을 쓸 수 있다는 것, 여행을 꽤나 좋아한다는 것 전부 처음 알았어요. 대책 없이 글 쓰다가 가끔씩 정신 놓고 괴상한 오타를 내는 사람이라는 것도, 기다림은 대단한 힘이고 사랑이란 것도. 기다리는 사람을 상상하면 머리가 금세 말랑해져요. 글자가 채비를 갖추고 달릴 준비를 해요. 과제도 교수님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얼른 완성하고 싶어질는지… 언제 도착할지 모를 제 메일을 기다려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기다리게 해서 미안했어요. 그래도 약속하지 않고 어떤 순간 갑자기 도착하는 편지도 나름 매력 있었죠?
진부하게, 이번 여행이 저에게 준 모두를 나열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게 가능하지도 않겠지만요. 저는 국문학도이지만, 제가 쓴 글을 드러내는 일은 극도로 기피했어요. 아는 건 쥐뿔도 없으면서 있어 보이려 애쓰는 가식적인 글. 그게 꼭 나 자신인 것만 같아 속상하고 화가 났어요. 아무리 써도 고쳐지지 않을 것 같던, 그래서 차마 드러낼 수 없었던 제 글의 습성은 역설적이게도 드러내길 마음먹으며 많이 달라졌어요. 여전히 부끄러운 글이지만, 여전히 가식적이고, 여전히 가진 것은 없지만, 그런 저에게도 제 글을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마구 드러내며 살아볼 거예요. 여행으로부터 얻은 것 중 유독 빛나는 하나는, 나를 더 많이 좋아하게 되었다는 사실. 부족을 무릅쓰고 감히 뛰어든 용기가 기특하고, 떼를 쓰다가도 결국엔 완성해낸 기지도 나름 멋지고, 단 한 번도 눈물 흘리지 않았다니 장해요. 감추지 않고 보여주기로 마음먹은 매 순간이 뿌듯해요. 용감할 줄 아는 제가 사랑스럽고 좋아요... (박명수 아저씨 톤으로) 환기 미술관에서 이런 문장을 읽은 적 있어요. 창작은 많은 경험에서 온다. 메일링 서비스를 이어가며 힘들었던 건 그런 거였어요. 내가 늘 같은 이야기만 하고 있다는 거. 계속 비슷한 말만 반복하는 자신이 제게도 또렷이 보여 아쉽고 슬펐던 것 같아요. 제 스물 두 해의 경험과 취향은 조금 유치한 것들이라 깊은 이야기가 되는 데 아무래도 무리가 있나 봐요. 자란 뒤에는 더 진득한 글을 쓸 수도 있겠죠? 그 얄팍한 경험들 속에서도 특히나 큰 임팩트가 되어주었던 이름들, 고맙습니다! 부족한 글로나마 소중한 사람, 소중했던 사람 모두 담아볼 수 있어 좋았어요.
엉성했던 Demarcita 파일럿 시즌은 이렇게 끝입니다. 그동안 정말 많이 감사했습니다. 여행을 무탈히 마친 것도, 메일링 서비스를 뜻대로 완주한 것도 몽땅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뵐 수 있을까요? 언제일지 알 수는 없지만, 또 편지 나눌 수 있다면 기쁠 거예요. 그 날이 올 때까지 멋진 경험과 취향들 열심히 쌓아가고 있을게요. 그때 더욱 흥미진진해진 이야기로 다시 만나요.
아 참... 저는 여행을 좋아하더라고요. 노래만큼은 아니어도.
Best Regards,
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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