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 끝났다. 3주라고 막연히 생각해왔는데, 따져보니 17일도 채 되지 않는 짤막한 날들이었다. 런던 마지막 날은 한국과 우루과이의 축구 경기가 있던 날. 처음 만난 영현의 학교 친구들과 런던의 펍에서 경기를 본다. 스트로베리 라임 맛의 맥주 한 병을 다 마신 탓에 알딸딸한 기분. 여행 막바지에 이런 새로운 경험이라니. 런던 마지막 날, 첫 만남. 끝과 시작은 늘 이렇게 함께인 걸까? 퍽 소년 영화 같은 문장이다.
서울행 비행기. 분명 제대로 챙겼다고 생각했던 에어팟이 가방을 세 번 엎어도 보이지 않는다. 덕분에 조악한 모양의 항공사 헤드셋에 의지해야 한다. 용케 영화도 예능 프로그램도 잘만 챙겨본다. 삼시세끼 어촌편을 보며 입맛을 다시다가, 집에 돌아가면 골뱅이 소면부터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미처 다 읽지 못한 노르웨이의 숲을 꺼내 든다. 책을 읽을 땐 노래가 빠지면 안 되는데. 기내 엔터테인먼트에 저장되어 있는 트랙을 대충 골라본다. 최신 가요- 절대 안 되지. 클래식 음악- 과하게 진지하다. 중국 음악- 이건 조금 낯설군요… 추억의 팝송- 클릭. 그렇게 재생되는 California Dreamin’. 그래 이거지. 오슬로에서 다 읽고 오겠다는 뻔뻔한 포부는 어디 가고, 밀고 나가는 속도는 여전히 주춤. 에라 모르겠다 싶어 노래에 집중한다. 중경삼림의 한 장면이 스치는 것만 같고 좋다.
공항철도. 몸 만한 캐리어 두 개와 무거운 배낭을 꾸역꾸역 끌고 서울역에 내린 나. 4호선으로 환승을 할까 고민하다 몇 초 만에 고개를 젓고 출구로 나간다. 마침 보이는 빈 택시. “타도 돼요?” 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기사님. 트렁크에 캐리어를 꼼꼼히 싣고 택시에 올랐다. 주소를 부르고 머리를 편히 기대는데, 이 무슨 영화적인 연출인지 California Dreamin’이 흐른다. 이런 순간엔 사소한 우연도 운명처럼 느껴진다. 단 한 번도 내용에 귀 기울인 적 없는 노래. 처음으로 그 이야기를 검색해본다. 필립스 부부가 뉴욕에 있을 때 뉴욕의 추운 겨울을 겪으면서 고향인 캘리포니아의 따뜻한 여름을 그리워하면서 쓴 곡이다. 아, 너는 내 운명이 맞구나.
여행이 내 안에 쌓이고, 돌아갈 날이 다가올수록 서글퍼지는 건 어쩔 수가 없나 봐. 초반 며칠은 한국에 갈 날이 벌써부터 서럽고 속이 뒤틀렸다. 난 새로운 것을 보고 느껴야 하는 사람인데. 이렇게 여행이 적성에 맞는 사람인데. 시시한 일상은 싫어. 어린 생각을 했다. 그러나 잊고 있었다. 익숙한 그 곳을 언제나 전제로 두고 있었다는 걸. 유로스타로 스친 프랑스 시골의 풍경에선 내 고향을, 조그만 페르시안 러그, 킬 빌과 브리짓 존스의 일기 디브이디를 살 땐 결국 돌아갈 나의 작은 방을 기억했다. 유독 해가 짧은 유럽의 밤에서 서울의 낮과 가을을 문득 떠올렸다. 베를린에서 조식을 먹을 때, 오슬로에서 브라운 치즈를 업어갈 때는 자취방에서 예쁘게 챙겨 먹어야지, 우스운 다짐을 했다. 파리와 런던에서 베트남 음식을 먹을 땐 혜화의 뎁짜이를, 빈티지 아디다스 운동화를 사들일 땐 내 신발장에 자리가 있던가. 벌써 잡힌 12월의 약속이 있고, 보고 싶은 얼굴들은 많고. 나도 모르는 사이 잔뜩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렇게 다시 나의 자취방. 큰 캐리어 두 개를 끌고 들어오자니 왠지 에어비앤비 숙소에 입성하는 것 같기도 하다. 괴상한 벽지, 각종 조명, 그랑핸드 사쉐, 러브레터 사운드트랙 씨디. 수상할 만큼 내가 좋아하는 것들뿐인데 처음처럼 어색한 이 공간이 반갑다.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받은 건 사장님의 전화. 9시간의 시차를 망각한 나의 실수 때문이다. 이제야 확인한 카카오톡 메시지. ‘무단퇴사도 괜찮으니까 연락만 받아라 ㅜㅜ’ 그 다음은 아빠. 잘 도착했냐는 무심한 물음. 어떤 나라가 제일 좋았어. 난 독일이라 답했다. 그 다음은 엄마. 아빠랑 와인 마시러 왔는데, 가은이 생각이 났어. 제주도 오면 같이 가자. 자연스럽게, 아무렇지 않게 일상으로 복귀한다. 애초에 여행과의 경계가 무뎌진 것처럼. 나, 여행이 분명 좋았거든. 그런데 많이 아쉽지 않아.
골뱅이 소면은 아직 못 먹음. 백색등은 싫으니까 조명만 점등함. 런던에서 산 체크 파자마를 입음. 품이 커서 조금은 우스꽝스럽지만 귀여움. 따뜻한 방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음. 냉장고 문을 열어보는 것조차 새삼스럽고 신이 나는데, 나 어쩌면 아직도 여행 중인 걸지도. 여행은 태도. 여행은 결심. 여행은 마음. 익숙한 거리를 활보해도 새로운 마음이면 다 여행인 거야. 17일의 결론은 이것.
여행이 끝났다. 새로운 여행의 시작이다. 끝과 시작은 늘 이렇게 함께인 걸까?
Best Regards,
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