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와 베를린에서 런던으로 돌아온 지 5일째. “이 정도면 충분한데”라는 건방진 마음이 문을 두드린다. 명백한 여행자였던 파리, 애매한 생활자였던 파리, 이제는 꽤 생활자다운 런던. 경험할 법한 여행의 모습은 다 맛보았다고 여겼다. 그러나 나에게 남은 한 발, 오슬로. 오슬로를 실제로 걸어보기 전까지는, 여행에 또 어떤 재미있는 이름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어느 저가 항공사의 위탁 수하물 규정에 질린 우리는 과감히 캐리어를 포기한다. 통통하게 채운 배낭, 덕분에 축 내려 앉은 어깨와 함께 오슬로로 향했다. 가방의 무게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화장품은 챙길 생각도 못 했고, 옷도 입고 가는 한 벌이 전부. 이래도 되나, 싶지만 당장은 내 어깨가 우선. 제법 가벼운 표정, 바람이 살벌하게 부는 오슬로로 간다. 파리와 베를린, 그리고 때때로 런던에서는 그런 생각에 매몰됐다. 얼마를 들여 도착한 이 곳에서 최대한 내 모습을 남겨야지. 랜드마크 앞에서 꾸며낸 표정을 짓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인증사진은 반드시 남기는 일, 어디를 갈 때면 사진 몇 장씩 찍어줘야 성에 차는 여행자. 가끔은 내 모습이 우습게 느껴져도 그게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하지만 오슬로에서는 그러지 못했다. 다름이 아니라, 너무 추웠다… 한 몸 가누기도 벅찬 추위 앞에서 인간은 심플해진다. 옷을 겹겹이 입어 몸은 둔하고, 장갑을 낀 손으로 무언갈 만지는 일은 귀찮다. 오랜만에 손이 여유를 부리는 동안 바빠지는 건 눈.
이틀 간 우리의 호스트가 되어준 예진 언니는 오슬로를 속속이 소개해줬다. 그 고요하고 넓은 세계를 구경하며 덜어냄의 달콤함을 알았다. 투명한 물 아래 비친 나를 한참 쳐다보고, 그러면서도 카메라는 꺼내지 않고, 숲을 걸으며 자박자박 발소리에 집중하고, 까만 건물 너머를 그저 바라보고. 요리의 결과물보다는 과정에 집중하고, 새로 만난 사람과의 대화에 한참 깔깔대고, 그러면서도 촉박해 하는 법이 없고. ‘남는 건 사진 뿐’이라는 말은 싫다. 지금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이 누군가에겐 거짓말이라고 해도, 무언가를 증명하기 위해서 사진을 찍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나는 손이 아닌 눈으로 즐기는 몇 초의 귀중함을 알았다. 애초에 그 경이로움이 내 실력으론 눈곱만큼도 담기지 못할 거라 생각하면 미련이 없어진다. 그냥 두 눈으로 실감하고 뜯어보는 게 훨씬 이득이다.
오슬로에서 얻은 여행의 이름은, ‘덜어내는 여행’. 화장기 걷어내고 마구 활보하기, 아무 생각 없이 호수 거닐기, 멋진 풍경 앞에서 카메라를 들기보다 눈으로 담기. 강하게 소유하기보다 느슨하게 함께하는 법. 허튼 포장, 혹시 몰라 챙긴 짐, 겉치레를 덜어내고 나면 배낭의 자리가 훨씬 넓어진다. 그 안에 새로이 채워갈 수 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오슬로에서 경험한 것 중 사진으로 남은 것은 반의 반도 되지 않지만, 오히려 나와 내 눈만이 아는 장면들이 애틋하다. 오래오래 잊히지 않았음 해서, 계속 곱씹게 될 기억들. 오슬로의 마지막 밤엔 눈이 내렸다. 내게는 첫눈이었다. 바보 같이, 또 천연덕스럽게 카메라를 들었다가 금세 내렸다. 눈이 큼지막해서 결정의 모양이 또렷하게도 보이더라. 눈이 예쁘게 내리는 밤 하늘은 깜깜하기도 하더라. 신기할 정도로 길고 느리던 밤. 칼바람이 부는데도 아늑하고 포곤하던 오슬로의 밤.
다시 한번 이런 문장을 적는다. 여행엔 얼굴이 많기도 하다. 여행이란 참 어려운 것. 복잡한 것. 그래서 좋은 것.
Best Regards,
G
p.s. 예진 언니, 고마웠어! 다 언니 덕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