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어떤 가게 이야기
스물 둘 여름방학. 무료한 방학을 어떻게 지낼까. 고민하던 내게 한 가게가 똑 하고 떨어졌다. 메뉴의 모양이나 음악, 재질, 색, 간판 하나하나 고심한 티가 나는 다이닝 바. 게으르기도 게으르고, 섬세한 편이 못 되어 식당이나 카페 아르바이트는 생각해본 적도 없는 나지만, 어쩐지 “여기라면 괜찮겠는데”란 생각이 드는 거였다. 북촌의 ‘프루’. 인생의 지점 중 취향 면에서 제일로 뚱뚱한 영향을 준 것이 프루. 프루는 처음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실망을 준 적이 없다. 너무 많은 것을 얻어서, 자신이 얌체처럼 느껴질 정도다. 음악을 즐길 때, 마음에 드는 단 한 곡에만 집중하지, 밴드나 앨범의 호흡 전체를 파악하는 것에는 취미가 없었다. 노래 취향에 물고 늘어진다는 사람 치고 퍽 좋은 태도는 아니지만. 아르바이트 첫 날, 좋아하는 가수를 묻는 질문에 한참을 망설여야 했다. 즐겨 듣는 노래는 많은데… 프루는 그런 내게 가수의 흐름을 따라가는 법을 알려줬다. 감상에 머무르기보다, 그의 이름, 얼굴, 목소리, 생활, 삶, 사람 전반을 두루 정복하려 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어떤 가게가 있었다. 어떤 가게에는 처음 읽는 이름들이 많았다. 펫 샵 보이즈, 더 스미스, 레드 핫 칠리 페퍼스, 어스쓰리, 시인과 촌장, 알란 파슨스. 나는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늘 부끄러워하는 사람이었지만 어떤 가게 안에서만큼은 그마저도 썩 괜찮았다. 벽면에 붙은 포스터들, 모르는 노래로 꽉 들어찬 플레이리스트, 함께하는 사람과의 대화. 뭐 하나 처음 아닌 것이 없고, 진작 빠삭하게 알고 있는 이름 한 글자 없었건만 왜 나는 후련하지. 아는 건 쥐뿔도 없으면서 그 사실이 자꾸 당당하다. 부타동 냄새가 솔솔 흐르는 주방 안에서, 샤잠을 옆구리에 낀 채 귀를 활짝 열어두는 나. 어떤 남자가 주었던 이소라나 오아시스도 이따금 흐른다. 그러나 그들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게 된 건 최근의 일. '듣기'와 '좋아하기' 사이. 듣는 법만 알던 나는 어떤 가게에서 좋아하는 법을 배웠다. 한 밴드에 지독하게 마비되어 보기. 좋아하는 가수 1초만에 대답하기. 같은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쉽게 빠져버리기. 그렇게 나는 모리세이의 목소리에 자동으로 허리를 펴고, 더 스미스를 1초만에 말하고, 더 스미스를 듣는 누군가를 오매불망 기다리는 사람이 됐다. 이다지도 소중한, 그런 가게가 하나 있었다.
4. 어떤 여행 이야기
내가 사랑한 베를린에는 빈티지숍이 많았다. 보일 때마다 들어간 열댓 개의 가게 중 뚜렷한 건 하나. 더 스미스와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노래가 잔뜩 나오던 가게. 그러고 보니 파리의 무인양품에서 흐르던 노래에 귀를 기울인 기억도 있다. 그게 얼마나 반가웠는지. 체크포인트 찰리에서는 영현과 함께 데이빗 보위의 Heroes를 들었다. 자꾸 이상하게 노래를 변주하던 내 모습에 혀를 차던 영현의 표정이 새록새록. 오슬로에선 예진 언니의 플레이리스트에 푹 빠졌다. 스티비 원더, 검정치마, 윌코, 비지스. 새로운 노래가 시작될 때마다 "이 노래는 또 뭐야!" 외치던 영현. 5호를 쓰던 런던의 카페에선 차일디쉬 감비노의 Redbone과 더 스미스, 비틀즈를 들었다. 샤잠을 계속 장전해둔 덕에 오마 아폴로라는 가수도 새로이 알게 되었고. 포토벨로 마켓의 한 중고 음반샵에서는 링고 스타와 어스, 윈드 & 파이어의 LP 두 장을 5파운드에 얻었다. 코벤트 가게의 빈티지숍에서는 어떤 가게의 주인장에게 선물할 3인치 바이닐 한 장을 샀다. 가게에 매일 같이 재생되는 존 레논의 Woman과 Beautiful Boy가 수록되어 있는.
어떤 여행이 있었다. 훗날 떠올리면, 수많은 노래들이 하염없이 흐를 여행이 있었다.
5. 어떤 노래
종종 인생에 음악감독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욕심이지만 펀치 드렁크 러브나 이터널 선샤인의 Jon Brion 같은... 알맞은 때에 적절히, 알아서 등장하는 훌륭한 배경음은 없지만, 내가 기억하는 장면들이 이렇게나 많다. 이렇게나 많은 노래와 감정이 있다. 그건 어떤 여자애가 준 것이기도 하고, 어떤 남자에게서 얻은 것이기도 하고, 어떤 가게에서 배운 것이며, 어떤 여행에서 함께한 것이기도 하다. 노래가 있는 한 내 기억들은 오래도록 함께일 거야.
어떤 노래가 있다. 잊히지 않을 어떤 노래들이 있다. 삶에 지나치게 간섭하지 않으면서도 진한 색과 맛을 더해주는 게 그 매력. 함부로 따라하고, 함부로 좋아하는 어린애 같은 성정을 가진 나는, 고작 몇 개의 플레이리스트에도 마음을 쉽게 줘버리는 사람. 나는 어떤 이야기를 노래로 기억한다. 내가 만난 어떤 사람들, 어떤 장소들, 어떤 마음들.
노래와 함께 또렷해지는 씬. 다음 장면엔 어떤 음악이 흐를까.
Best Regards,
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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