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떤 이야기를 노래로 기억한다.
1. 어떤 여자애 이야기
집에서 내가 다니던 중학교까지는 버스로 40분 거리. 멀기도 한 그 학교에 함께 입학한 동네 친구가 있었다. 걔의 이름은 수현. 수현은 내가 기억하는 가장 최초의 친구. 사랑스런 단발머리에 또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애. 긴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리는 당찬 애. 나는 예쁘장하고 다부진 그 아이를 꽤 좋아했다. 우리는 매일 같은 버스를 타고 등교했다. 내가 먼저 우리의 지정석에 앉아 있으면, 세 정거장 뒤 수현이 버스에 오르는 것이 규칙. 40분의 학교로의 여정. 우리는 시간에 노래를 꾹꾹 눌러 담았다.
어떤 여자애가 있었다. 어떤 여자애가 둘 있었다. 그 여자애들은 이어폰 한 쪽 씩 나누어 끼고 노래를 주고 받았다. 오늘은 다이나믹 듀오, 내일은 재지팩트, 모레는 제프 버넷, 프라이머리, 레드벨벳. 노래 취향은 대부분 청소년기에 결정된다는데. 나는 수현 덕에 2명 분량의 그것을 가졌다. 우리는 손을 잡고 다니거나 화장실에는 꼭 같이 가야 하는 부류는 아니었지만, 서로의 남자친구를 가장 싫어하고, 등하교 버스의 옆자리는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는 쪼잔한 중학생들이었다. 수현은 ‘아마도 그건’을 가장 좋아했다.
사랑 그것은 알 수 없는 너의 그리움
남아 있는 나의 깊은 미련들
다시 올 수 없는 시간들
이제 우리의 등교길에는 서로가 없다. 이따금 그리워지면 어떤 노래들을 꺼낸다. 그러면 영혼만큼은 열여섯으로 돌아가서, 조각들을 생생하게 뜯어볼 수 있다. 울며불며 함께하던 유치한 날들은 한참 지났고, 수현의 버스 옆자리에 앉은 마지막 날이 언제였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고, 그렇지만 나는 그 예쁘장한 아이를 여전히 많이 좋아하고. 오랜만에 '아마도 그건'을 듣는 날이면 수현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그때 생각난다, 그런 실없는 말을 한다.
2. 어떤 남자 이야기
이상형을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건 뭐야? 나는 얼굴이 작은 사람이 좋고요. 손이 예뻤음 하고요, 리바이스 진과 슈프림을 좋아하고, 책과 친밀하다면 좋겠죠. 변진섭의 ‘희망사항’을 부르듯 경쾌하게 흥얼대는 나(여보세요 희망사항이 정말 거창하군요-라고 말하는 노영심의 목소리를 좋아한다). 그러나 역시 가장 중요한 건... 최초의 친구와 노래를 나누며 우정을 다지던 코흘리개는 노래 취향에 연연하는 시시한 어른이 됐다.
어떤 남자가 있었다. 그는 작은 얼굴과, 크고 예쁜 손을 가졌다. 책과 친밀한 것은 잘 모르겠지만 썩 괜찮은 노래들을 좋아했다는 건 분명하다. 우리는 비슷한 노래를 들었다. 내가 죄다 따라했으니까. 나는 그에게 전람회를 줬고, 그는 나에게 마빈 게이, 이소라를 줬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오아시스도 부분적으로는 그에게서 받은 것. 친구라는 이름으로 하이볼을 마시던 밤에는 마이클 부블레가 흐른다. 버스 맨 뒷자리, 땀이 날 만큼 손을 꼭 붙잡고 브로콜리너마저와 검정치마. 언젠가, 이제는 너와 함께한 노래를 들으며 너를 떠올리지 않는다는 얄미운 문장을 쓴 적이 있다. 사실 나는 아직도 그 가사들을 곱씹는다. 나랑 아니면 누구랑 사랑할 수 있겠니. 그런 가사에 내가 떠올릴 수 있는 단 한 사람.
그가 좋아하던 가수의 신보를 나 혼자 듣는다. 그 사실이 조금 분하다. 서운하다. 아쉽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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