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12일.
“가은, 꼭 런던에 와. 몸만 와도 되니까.”
“응, 나 정말로 갈게!”
처음은 이랬다. “다음에 밥 한번 먹자” 같은 대화. 런던이 경기 외곽 지역이라도 되는 것마냥 간단하게, 만만하게.
나에게 가장 소중한, 따위의 질척거리는 말로 소개하게 되는, 영현이 런던으로 떠난다. 교환학생이라는 이름으로. 영현의 런던 기숙사에 외부인의 출입이 가능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솔직히 말해 큰 감흥은 없었다. 그냥, 그냥, 그냥. 대답이었다. 꼭 갈 거야, 떵떵대다가도 한 켠에는 내가 진짜 떠나겠어? 라는 마음. 나는 런던보다는 차라리 도쿄가 좋고, 여행보다는 생활이 좋다. 이십 대 청춘의 흔한 버킷리스트라는 유럽 여행, 단 한 번도 로망인 적 없다. 예진, 소운 언니, 그리고 영현과 오랜만에 만났을 적에, “죽을 때까지 여행과 음악 둘 중 하나만을 누릴 수 있다면 무얼 고를래?”라는 시시한 소재가 똑 떨어졌었다. 나는 생각했다. 이게 상대가 되나? 사람의 인생에 우선순위가 대략 확정되어 있다면, 여행은 내게 순위권 한참 밖의 것이었다. 어떤 이름과 붙더라도 너무 쉽게 져버리는.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의미를 찾는 것이 훨씬 중요해서? 뭐 그런 로맨틱하고 오그라드는 이유는 절대 아니고… 무서웠다.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윙윙대는 도시, 낯선 얼굴의 사람들, 살벌한 물가, 몇 시간의 비행, 어지러운 절차, 돈, 돈, 돈… 그런 것을 고민하는 일 자체가 두려워 애초에 생각지 않기로 했다. 그러다 보면 내 생활에 얼추 만족하게 되고, 여행이 그저 귀찮은 일로만 여겨진다. 두 눈 깜빡이지 않고도 “난 여행에 별로 관심 없어.”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참 웃기는 일이지. 그런 내가 3주나 떠나게 되었다. 런던과 파리, 베를린과 오슬로로.
2022년 11월 8일.
나는 런던. 나는 런던행 비행기 안이다. 이렇게 긴 비행도 처음, 이렇게 긴 여행도 처음. 몽땅 처음인데, 더구나 지금은 혼자다. 철저하게 낯선 순간에 갇힌 나는 사실 두렵지 않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롭고 신이 난다. 이제야 알았다. 애초에 두려웠던 적이 없다. 두려운 척하지 않으면 떠난 이를 하염없이 부러워하게 될까 봐, 나도 대책 없이 떠나고 싶어질까 봐 자신을 한참 속였다.
11월 8일. 영현이 처음 ‘런던에 오라’고 말한 지 대강 4개월이 지났다. 나는 그곳에 ‘정말로 가게’ 되었다. 영현은 몸만 오라고 했으나, 짐이 꽤나 많다. 통통한 겨울 아우터(파타고니아 플리스는 여전히 발송 준비 중.......), 편지를 쓰기 위한 노트북, 필름카메라, 폴라로이드 카메라, 디지털 카메라(본업이 사진인 것처럼), 새 다이어리, 책 한 권(결국 '노르웨이의 숲'을 택했다). 개중 압도적으로 무거운 것은 기대하는 마음. 그런 마음. 하도 묵직해서 가끔은 나를 짓누르지만 그래도 절대 버릴 수 없는 나의 중한 수하물. 이번 여행을 계기로, 우선순위에 변화가 생길까. 이제 뻔뻔하게 여행에 관심 없다는 말은 하지 못하게 될까. 음악이 아닌, 여행을 고르게 될까. 그것도 아니라면, 정말 여행을 싫어하게 될까. 확신할 수 있는 게 단 한 가지도 없는 이 상황이 왜 이리 즐거운지.
소매치기로 흉흉한 도시에 간대도 걱정되지 않아.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쉽게 낚아채 갈 수 없다.
나는 기대하는 마음 하나 꽉 끌어안고 떠난다.
나는 런던!
Best Regards,
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