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부한 주제지만, 첫사랑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첫-사-랑. 간지러운 발음을 뱉으면, 이 사람이 떠오른다. 초등학생 때 우습게 좋아했던 깡마른 남자애도 아니고, 처음 사귀었던 남자친구도 아니다. 가장 오래 만난 애인도 아니고, 처음으로 구질구질하게 매달려 본 그 남자도 아니다. 나의 첫사랑은 지금 내 옆에 있는 아이. 이 먼 땅까지 기어코 날아오게 만든 장본인. 앞으로 몇 주는 함께 낯선 것을 보고 나눌 사람. '나에게 가장 소중한' 영현. 내가 세상에 태어나 배운 사랑은 모두 영현을 빼놓고는 설명하지 못하는 것들뿐이다. 영현을 소개하려는 지금, 나는 내가 아는 가장 좋은 단어들만 꺼내 보이고 싶어 안달이 난다.
나와 영현은 고등학교에서 만났다. 한 학년에 100명 남짓 조그만 외국어 고등학교. 게다가 기숙학교였으니 동급생이라면 금방 가까워질 수밖에 없는 구조. 학기 첫날, 옆 반 학생이었던 영현을 처음 만나 내가 했던 생각은 놀랍게도 "친해지기 어렵겠다." 왠지 무뚝뚝해 보이는 표정이 영 다가가기 어렵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건방진 오해였음은 금방 알게 됐다. 무른 말투, 약간은 남의 눈치를 보는 모습, 낮은 웃음 장벽, 웃는 모양. 언뜻 차가워 보였던 무심한 얼굴은 사실 긴장이 그득그득 묻은 탓이었다. 누가 그랬는데. 알면 사랑하게 된다고. 영현의 진짜 얼굴을 본 나는 그 애가 금세 좋아졌다. 어쩌다 보니 가까워졌고, 어쩌다 보니 늘 붙어 있었고, 어쩌다 보니... 이 시시한 표현을 정말 싫어했는데, 이것이 아니면 우리 사이를 설명할 도리가 없다. 언젠가 돌아보니 그랬다. 정신 차려 보니 내 옆에 영현이 없는 게 낯설고 이상하게 느껴졌다.
둥글게 모여 앉아 행복했던 작은 가게가 문 닫자 처음 눈물을 보인 너, 나는 조금 놀라서 어색하게 웃었지~
일하는 이자카야에서 이런 노래가 흘러나온 날이 있다. 곧바로 영현이 떠올랐다. 친구들 사이에서 영현을 놀릴 때마다 나오는 이야기. 영현이 좋아하거나 가고 싶어 하는 가게들은 죄다 문을 닫는다는 것(네 취향이 남달라서 그런 거라고 위로해준다). 그와 꼭 들어맞는 것이 웃겨 찬찬히 들어 보니, 이건 영락없는 영현의 노래였다. 작은 꿈을 꾸는 사람을 지켜주고, 힘없는 것을 안아주고, 꽃을 밟지 않으려 뒷걸음을 치는. 영현은 그런 부드러운 힘이 있는 사람. 나는 장난삼아 "너 때문에 눈이 높아져서 어떡하지?" 말한다. 추운 날에도 멋쟁이는 얇게 입는 거라며 덜덜 떠는 내게 목도리를 둘러주고, 앞뒤 가리지 않는 충동에도 웃으며 함께해주고(그렇게 우리는 '호주머니 속의 독서'를 시작했다), 내 모든 기록을 제일 먼저 들여다보고, 제 필름으로 가장 자주 담아낸 피사체가 나인 사람. 혼자서도 뭐든 척척 해내고, 그렇지만 가끔 귀여운 투정을 부리는 일도 잊지는 않고, 모든 사람에게 무던한 듯 다정하고, 고맙다는 말이 몸에 배어 있는, 멋들어진 취향을 가지고 있어 따라 하고 싶어지는, 똑똑한 사람.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안도감이 되는 사람.
2019년 겨울, 수시로 접수한 6개의 대학 모두 내게 '불합격'이라는 단어를 내밀었다. 어쩐지 부끄럽고 서러워서 집에 한참 처박혀 있다가, 처음으로 만나기로 마음먹었던 사람이 영현이었다. 영현은 재수를 결심한 내게 '이 학교'는 널 다시 찾을 거야. 너는 무조건 추가 합격할 거야. 라며 뜬구름 잡는 소릴 했다. 그리고 이틀 뒤, 어처구니없게도 나는 정말 그 학교에 합격했다. 아무래도 영현의 말이라면 그냥 한번 믿어보자 생각하게 된 건 이 일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떨 때는, 나보다 나를 더 확신하는 사람이 이 아이인 것 같다. 따끈한 확신 속에서 오늘도 나아갈 힘을 얻는다. 그 덕에 나는 쑥쑥 자랐다. 그게 참 고맙고 소중해서, 사랑이란 단어가 미울 지경이다. 내 마음을 표현하기엔 역부족이다.
모든 시간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아주 많이 다르다. 아직도 나눠야 할 것이 한참 남았다는 사실이 기쁘다.
영현이 올해 내 생일에 쓴 카드에는 이런 가사가 적혀 있다.
Like brothers in blood, sisters who ride
And we swore on that night we'd be friends til we die
When I'm cold, in water rolled, salt,
I know that you're with me and the way you will show
And you're with me wherever I go
And you give me this feeling, this everglow
나는 덕분에 이 노래를 알게 되었다. 우리가 함께 나눠야 할 것은 여전히, 너무나도 많다.
이 여행을 결심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