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의 빈티지샵에서 이 노래가 흘렀어요.
1. 베를린의 하루는 짧다.
파리에서 베를린으로. 베를린의 땅을 처음 밟는 순간에 들었던 느낌은 '어둡다'. 밤 비행기로 도착한 거라 그렇겠거니, 여겼지만 다음 날에 베를린을 활보하며 제대로 알았다. 베를린의 하루는 짧다는 걸. 늦게 뜨고, 빨리 지는 곳. 오후 4시쯤이면 서서히 해가 지고, 6시면 깜깜한 밤의 시작이다.
2. 베를린은 고요하다.
베를린은 신기할 만큼 고요하다. 어디를 가도 사람으로 가득한 런던이나 파리와는 달리, 베를린의 거리는 다소 조용하다. 사람들이 있어도, 복작이거나 시끄러운 느낌은 없다. 신기했다.
3. 베를리너들은 쿨하다.
파리지앵들은 대체로 다정한 느낌. 베를리너는 쿨한 느낌. 표정이나 말투에서 진작 부드러운 파리지앵보다는 경직되어 있다. 그런데 섹시한 독일어 발음 사이로 언뜻 발사되는 조그만 미소 같은 것이 있다. 그것이 무지 쿨하다! 스타일도 마찬가지. 가죽자켓과 리바이스 진, 노스페이스 아우터를 참으로 사랑하는 베를리너들...
경직되었달까, 가지런하달까. 아무튼 베를린에는 그런 반듯하고 딱딱한 사랑스러움이 있다. 흐트러진 모습이나 다정을 함부로 내보이지 않지만, 가끔씩 발견되는 은밀한 귀여움... 같은 것 때문에 속수무책으로 빠져든다. 나는 평소에도 그런 사람을 좋아하곤 했는데, 이 도시가 꼭 그 사람과 같다. 네 개의 행선지 중 가장 기대했던 베를린. 베를린은 양껏 걸었던 기대보다도 더한 것을 주었다. 에어비앤비 방명록엔 베를린에서의 기억은 특별한 선물 같다고 썼다. 소중한 사람에게 받은 너무도 맘에 드는 선물. 나를 생각하며 준비해주었다는 사실만으로 벅찬데, 그 안에 든 물건까지도 마음에 쏙 들어버리는..... 베를린에서의 날들이 그랬다. 아무래도 사랑에 빠진 거다. 일방적인 사랑이라고 해도 좋다. 난 짝사랑에 익숙하고 능한 편이니까...
내가 베를린에서 해낸 일들은 실상 그리 대단하지 않다. 무지하게 자잘하고 사소한 것들이다. 아이스크림 세 번 먹기(호키포키 블루베리-마스카포네 치즈 맛), 빈티지 쇼핑하기(베를린엔 빈티지샵이 참 많다), 길거리 사람 구경하기(쿨-한 사람들 뿐), 에어비앤비 조식에 감탄하기(매일 아침 7시면 눈이 번쩍 떠졌다), 즉석사진 잘 나올 때까지 다시 찍기(4번 정도 찍은 듯...), 이름도 모를 공원에서 조각케이크 먹기(피스타치오 맛이었다). 관광지라고 할 만한 곳은 체크포인트 찰리 하나 가봤다. 그마저도 사진 한 장 찍지 않고, 기념품 숍을 깔짝인 것뿐. 누군가에겐 하찮고, 시간낭비로 여겨질 법한 것들. 이를 테면... '한국에서도 할 수 있는' 것들. 일반적인 여행과는 사뭇 다른 이름들. 그러나 나는 그 여유로 하여 베를린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4일이라는 시간 안에서 여행자의 마음으로 바삐 걸어다닌 기억이 딱히 없다. 나는 그곳의 사람이 된 것마냥 조바심 내지 않고, 천천히 걸어봤다. 내게 4일보다 훨씬 많은 날들이 주어진 것처럼 굴었다. 잠시 베를리너가 된 나는 어쩐지 조금 쿨해진 것도 같다.
한 권의 책을 두고 인생의 터닝포인트라 칭하는 건 오만이고, 어쩌면 조금 부끄러운 것일 수도 있지만,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을 소개할 때면 그 단어를 꼭 들이민다. 평생 곱씹을 책에서 내가 얻은 궁극(?)의 메시지는 '여행자의 시선으로 일상을 향유하기'였다. 그런데 이것이 거꾸로 '생활자의 시선으로 여행하기'도 된다는 건 이제야 알았다. 난 초심자라 어떤 여행이 정답인 지 알 수 없고, 사실 여행에는 정답이랄 게 없는 것이 맞기도 하다. 베를린에서 얻었다고 장담하는 하나는, 내가 감히 생활자의 태도로 여행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사실. 여행 일주일 차. 나는 내가 어떤 여행자가 되어야 할지 아직 헷갈린다. 파리와 베를린. 두 여행은 달랐다. 파리에선 꽤나 바빴고, 베를린에선 한껏 여유를 부렸다. 어떤 곳에선 명백한 여행자였고, 어떤 곳에선 애매한 생활자였다. 여행엔 얼굴이 많기도 하다. 여행이란 참 어려운 것. 복잡한 것. 그래서 좋은 것.
베를린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면, 나는 여행을 좋아한다고 너무도 덤덤하고 당연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런던은 어떨까. 어쩐지 잔뜩 기대되는 것이 예감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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